그날의 일은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찬바람이 제법 불어오던 겨울의 늦은 밤. 작은 창밖은 마치 고장 난 TV처럼, 밤하늘의 별처럼, 새카만 어둠 속에서 점멸하는 불빛을 그린다. 형형색색의 네온사인과 복잡하게 얽힌 낡은 전선들이 낯설게 보일 날은 없을 줄 알았는데. 너무나 벗어나고 싶었던, 어둡고 더러운 골목이 아름답게 보일 날은 죽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나는 당신이 나의 마음을 긍정해 준 순간을 잊을 수 없었고, 그 순간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마치 프레임 속에 박제된 그림처럼 나의 마음 깊숙한 곳에 박힌다. 조금이라도 그것이 마모될까 두려웠던 나는 잘게 떨리는 손으로 당신을 끌어안는다. 그 따스한 품 안에서, 치기 어린 고백을 받은 각본가는 그저 어린 배우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사랑을 하는 것과 사랑에 대한 선언은 완전히 다른 것이지. 사랑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배우의 선언은 스스로에게 약간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우리가 사귀게 된다면 무엇이 달라지나요? 당신을 독점하고, 당신과 맞닿을 수 있다는 조건을 말하고 싶진 않다. 당신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잖아. 어린 그녀는 그녀가 가진 두려움을 언어화하는 것에 서툴렀다. 천천히 등을 쓸어내리던 각본가는 잠시 무언가 고민하더니, 옅게 웃으며 연인에게 속삭인다.
Condition
일단 만남의 목적이 달라진다는 건 알겠어. 당신과 밥을 먹기 위함이나, 당신과 대본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당신만을 보기 위해 날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에 묘한 간지럼을 느낀 기성은 주머니 속의 티켓을 초조하게 매만졌다. 첫 데이트 장소가 영화관이어도 괜찮은 건가? 당신이 사랑하던 일출을 보러 함께 산먼자이에 가볼까도 생각했지만, 아직 면허를 따지도 못한 내가 드라이브를 제안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녀가 습관적으로 혀를 차려던 찰나, 멀리서 다가오는 연인이 보이자 구겨진 스니커즈를 빠르게 고쳐 신는다.
“그….”
“아, 일찍 와 있었어?”
“네? 아뇨…. 아니! 맞지만….”
긴장되어서. 늦을까 봐. 아니, 기다리게 할까 봐. 실수할까 봐.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흘러나오는 문장에 기성은 눈을 질끈 감는다. 괜찮아. 나도 기대했는걸. 연인은 위로하듯 나긋이 다독여주었다. 살풋 눈을 뜨면 그녀를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당신이 있다. 연인이 있다. 그러고 보니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 어색하게 뒷머리를 매만지던 기성은 그녀의 손가락을 살며시 쥐어보며 연인의 이름을 불러본다. 하일군.
당신을 아군이라 불렀던 이유는 당신들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높이에 서 있고 싶기 때문이었거든. 까치발을 들고 필사적으로 서 있는 것 같은, 그러한 불순한 의도로 연인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다. 아군이 더 좋아요?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기성의 앞머리를 정리해 주며 하일군은 작게 웃었다. 원하는 대로 불러도 괜찮다면서. 조금은 투정을 부리고 싶은 대답이었지만 지금은 그녀의 다정한 손길을 느끼는 것이 좋았기에 기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의 손가락을 쥐고 있던 손으로 살며시 깍지를 끼고,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체온을 느끼면서.
시간에 맞춰 도착한 영화관의 내부엔 이미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연인과 함께 숨을 죽이며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으니, 가슴께에 긴장으로 뭉쳐있던 묵직한 한숨이 천천히 흘러나온다. 영화를 업으로 하는 우리에게 이 공간이 데이트 장소로 적합한지 여전히 알 길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함께 있는 시간을 즐기고 싶다. 이제야 말하지만, 그러한 마음으로 잘 보지도 않는 로맨스 영화를 골라봤어. 등 뒤에서 탈탈거리는 상영기의 소음과, 하얀 불빛을 통해 보이는 작은 먼지들. 잦아드는 사람들의 속삭임. 옆에 앉은 연인의 숨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적막 속에서 이윽고 영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순간 어쩐지, 배우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 당신과 내가 함께 앉아 있는 것. 같은 시야를 공유하는 것.
우리는 지금 하나의 삶을 함께 체험하고 있다.
영화를 누군가의 삶이라 한다면 나는 영원히 당신이 써준 각본에 맞춰 살고 싶었다. 그리고 당신은 영원히 나라는 문장을 써줬으면 했어. 우리는 배우와 각본가로 살며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다. 기성은 영화를 보고 있는 연인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맑은 눈에 누군가의 삶이 비치고, 얼굴 위로 가벼운 미소가 떠오른다. 아름다운 걸 볼 때 당신은 늘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성은 다시 고개를 돌려 영화 속의 인물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살며시 손을 뻗어 당신의 손을 잡는다. 이제 나는 알 것 같아. 사랑을 하는 것과 사랑에 대한 선언은 완전히 다른 것이지. 사랑만으로 만족할 수 없던 나는 약간의 두려움을 안고,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를 물어보았다. 여전히 나는 당신을 독점하고, 당신과 맞닿을 수 있다는 조건을 말하고 싶진 않아. 그러나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답을 찾은 것 같아.
나는 당신과 함께 하나의 삶을 체험하고 싶다. 같은 시야를 공유하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시야가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그러한 독백을 끌어안고 기성은 하일군의 손을 꽉 그러쥐었다. 이 순간을 공유하는 모든 것들이, 마치 프레임에 박제된 그림처럼 그녀의 깊숙한 곳에 박힌다. 이날의 일은 평생 잊지 못할 거야.